‘다 큰 자식’과의 관계에 힘겨운 부모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3-08 14:28 조회1,499회 댓글0건본문
상담사 | 강동센터 성현주 선생님 |
---|---|
주제 | 성인, 부모 |
대상 | |
기타 |
‘다 큰 자식’과의 관계에 힘겨운 부모들
헬로스마일 강동센터 성현주 선생님
가족 상담사라는 직업이 때로는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될 때가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말하지 못해 병이 난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 때 그렇다. 임금님만큼 무서운 것이 다름 아닌 ‘다 큰 자식’ 들이다. ‘다 큰 자녀’와 관계에 힘겨운 부모들의 심정은 비슷하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는 내 몸같이 좀 편해지고 만만해지는데 자식은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 거리감도 생긴다. 부모의 사소한 말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는 ‘다 큰 자식’ 들을 보면서 당황하며 울화병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식의 허물에 대해 어디가서 입을 떼기도 쉽지 않다. ‘누워서 침뱉기’아닌가! 자책하면서 무력감을 경험하거나 서글픈 심정이 된다. 자녀들의 부적응문제에 “내가 아무래도 아이를 키울 때 뭘 잘못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부모로서 뭘 하면 될지 알려달라” 고 한다. 최근에는 그런 부모님들이 더 많아진 듯하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 후에 툭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다’ 며 응급실을 간다.‘아무래도 심리문제인 것 같다’며 자녀와 함께 왔다. 초조성 우울과 불안 발작(공황증세) 이었다. 자녀교육을 중시하는 베이비부머세대인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면서 자녀의 학습이나 진로에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녀는 정해진 대로만 하면 다음 단계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취업은 다른 문제였다. 정해진 것 없이 자신이 길을 찾아 선택해야했다.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좌절이나 실패의 경험도 없었다. 부모님이 모든 선택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취업문에서 무력한 자신을 직면하기보다는 아픈 것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 선택이지만, 외부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작도 없었으니 실패도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녀가 고민할 시간과 기회를 통해 심리적 발달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충고하지 말고, 더 이상 자녀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거리를 둬서 아이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않은 성인자녀의 부모도 부모교육이 필요하다. 에코붐 세대(1980~1995출생)로 불리는 20대 초반~30대 중반의 자녀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라고 한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사회에 진출하면서 취업의 벽에 부딪힌 ‘N포’의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 구조 탓에 이전 세대보다 훨씬 긴 시간을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성인 자녀는 여전히 부모의 규제나 통제를 감수해야 할 처지에 있다. 성인임에도 부모가 자율성이나 독립성에 제약하는 바가 있다보니 자녀들과 좋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 세대는 청소년기에 IMF라는 트라우마로 삶의 기반이 위협받은 경험도 있다. 그로인해 돈에 민감하고 연대감에 냉소적이고 지나치게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게 되었다. 돈 때문에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에 노출됐고 그 사이 자녀들은 은연중에 정서적 방임이나 결핍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가족에게 단절을 선언하고 월셋방을 얻어나간 아들로 깊은 시름에 빠진 어머니가찾아왔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웠던 아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 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을 잘 수도 없고, 인생이 실패한 것만 같아 우울증이 생겼다. 아들을 키우면서 무엇을 강요한 적도 없었고 큰소리 한번 없이 순하게 키웠다. 그러나 예민하고 영민한 아들은 엄마자신조차 모르는 엄마의 마음에 반응을 했다. ‘유년기에 자리잡은 깊은 수치심으로 자랑거리를 늘 필요로 했던’ 엄마의 기대에 부응했던 것이었다.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것을 엄마는 몰랐었다. 아들이 얼마나 힘겹게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왔는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 어머니는 싸우려 덤비는 다른 집 자식이 부럽다고 한다. 그것 자체가 만회할 기회이고 희망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고.
성인 자녀가 부모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고 있다면 자신이 괜찮은 부모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녀가 부모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부모에게 뭔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 큰 자녀’가 부모에게 무례하게 대하면서 시비를 걸어오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결핍을 지금이라도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대상복구의 소망이다. 어느 때인가 받았어야 할 그 사랑을 지금이라도 달라고 하는 것이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몸부림이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시비에 걸려주고 맞상대도 해주고 원망도 들어줘야 한다. 자녀의 원망을 자신의 힘겨움이나 신세 한탄으로 입을 막으면 비겁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쉽사리 ‘미안하다’ 라고 사과해버려서도 안된다. 진정성이 의심되기 때문이다. 자녀의 원망에 부모가 좀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자녀도 화가 풀린다. “그때는 내가 더 힘들었다”는 말로 회피하거나 변명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 “성인이 되었는데 무슨 부모 탓을 하냐” 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다 큰 내 자식’이 여전히 ‘탓할 대상’ 으로 버티고 씩씩하게 있어주는 것이 성인 자녀를 둔 부모노릇이다. ‘참 다행이다’ 라며 안도할 일이다. 원망하고 화풀이를 하고 나면 그제서야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부모를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성인자녀에게 기꺼이 잊혀지는 부모가 되는 것이 좋은 부모이다.